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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잔혹한 역사를 예고한, 한 남자의 충성 | Collector
또 다른 잔혹한 역사를 예고한, 한 남자의 충성
오마이뉴스

또 다른 잔혹한 역사를 예고한, 한 남자의 충성

도심의 골목마다 메아리치던 6월 항쟁의 함성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1988년 초반. 직선제로 선출된 첫 대통령이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청와대에 입성한 노태우의 곁에는 오래전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온 하나회 출신 장교 이현우가 있었다. 그는 대통령 경호실장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의 심장부에 자리를 잡았다. 거리에는 아직 최루탄의 냄새가 남아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으로 쟁취한 직선제의 기억이 생생했지만, 청와대 경호실은 군사정권의 습속과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였다. 민주화라는 새 옷 위로도 지워지지 않는 낡은 군복의 냄새처럼, 그 조직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이현우의 '충성'은 이미 또 다른 잔혹한 역사의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현우의 이력은 '충성'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권력과 결합해 변질되는지를 보여주는 압축된 연대기였다. 육사 17기 출신으로 생도대장을 지냈고, 하나회의 핵심 축을 형성했던 그는 5공 시절 권력의 이너서클을 통과하며 성장했다. 군 경력의 정점에서 중장으로 예편한 뒤 곧바로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이동한 순간, 그의 계급장은 단순히 군복을 벗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더 질기고 보이지 않는 권력의 사슬로 전환되었다. 군에서 학습한 충성이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이었다면, 청와대에서 요구된 충성은 '지도자 개인에 대한 절대적 헌신'이었다. 이 두 층위의 충성이 겹쳐지는 지점에서, 윤리와 법의 경계는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6월 항쟁 이후 출범한 제6공화국은 겉으로는 민주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었다. 1988년 3월부터는 단체에 한해 청와대 경내 관람이 허용되는 등 제한적이나마 개방 조치가 시행되었다. 경호실의 인적 구성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사실 경호실은 1963년 창설 이래 외부에 쉽게 문을 열지 않는 폐쇄적 조직이었다. 1966년 처음으로 공개채용이 실시되었지만, 이는 군 특수부대나 체육계 인사 등의 추천을 전제로 한 '준공개채용'에 가까웠다. 이후에도 몇 차례 유사한 방식의 선발이 있었으나, 지원자 풀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던 중 1988년 8월, 경호실 창설 이후 처음으로 형식적 의미의 공개채용이 실시되었다. 다만 경호공무원 채용 공고가 군과 경찰 등 경호 유관기관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완전한 개방으로 보기는 어려운 한계도 분명했다. '사병집단' 이미지 벗으려 몸부림, 그러나... 경호실의 공개채용은 민주화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조치였다. 이는 군사정권 시기의 '사병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국민과 함께하는 전문 경호기관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제도적 변화에도 조직 내부는 여전히 강한 위계와 충성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었다. 공개채용으로 선발된 일부 인력이 군·경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제한적 다양성이 확보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조직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당시 공개채용으로 임용된 한 전직 경호관은 "일부 신임 직원의 배경이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조직 전체를 민주화된 기관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수뇌부와 주요 보직자 대부분이 군 특수부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조직문화는 여전히 병영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경호실 내부에서 '충성'은 여전히 강압과 배제의 언어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대통령의 안전을 명분으로 한 각종 통제, 이동 동선의 설정과 접근 절차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경호실은 '안전'이라는 논리를 통해 권력 접근의 관문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누가 대통령과 접촉할 수 있는지, 어떤 경로로 의사 전달이 이루어지는지를 선별하는 기능 또한 경호실에 집중되었다. 더불어 과거 권력기관의 연속선상에 있는 조직이라는 인식은 내부 구성원들에게 일정한 선민의식을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 속에서 이현우의 역할 역시 대통령 접근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기능과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 이렇듯 충성의 양상은 물리적 강제력보다는 더욱 은밀하고 제도화된 방식으로 나타났다. 노태우 정권 초기의 비자금 조성과 관리 과정에서, 이현우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관련자 진술과 사법적 판단이 존재한다. 당시 조성된 자금의 일부는 금융기관 계좌 등을 통해 관리되었으며, 정치자금과 권력 유지에 필요한 재원으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현우는 이러한 자금의 관리와 집행 과정에서 대통령의 의중을 매개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충성'은 국가나 공적 질서에 대한 헌신이라기보다, 권력자 개인과 그를 둘러싼 비공식적 자원 구조를 유지·보호하는 형태의 '시작 경호'로 작동했던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노태우는 취임사에서 북방외교를 핵심 대외정책 기조로 제시하고, 1988년 7월 7일 '7·7 선언'을 통해 대공산권 외교를 본격화했다. 이후 한국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여 1990년 한소 수교를 성사시켰고, 1991년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냉전 질서 속에서 한국 외교의 지평을 확장한 중요한 전환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서도 권력 핵심부를 둘러싼 경호와 통제의 구조, 그 속에서 작동하는 '충성'의 양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1990년 12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모스크바 방문은 한소 수교 이후 양국 관계를 공고히 하는 상징적 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호실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냉전이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상황에서 잠재적 위협 가능성이 상존했던 만큼, 고르바초프의 외교고문 도브리닌의 상춘재 비밀회동으로 시작된 북방정책의 막후 외교가 표면화되는 순간까지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감당해야 했다. 이현우가 이끄는 경호조직은 대통령의 이동과 접촉을 엄격히 통제하며 경호 역량을 집중적으로 운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외교 현장에서는 양국 경호 인력 간 협조와 긴장이 병존하는 가운데 동선과 접근 통제를 둘러싼 조율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경호 활동은 국가적 외교 성과를 뒷받침하는 한편, 권력 핵심을 둘러싼 폐쇄성과 통제의 구조가 해외 순방의 공간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권력 접근 경로 조정하는 위치로 확장된 경호실장의 역할 경호조직에서 지도자 개인에게 집중된 충성은 필연적으로 광범위한 보안과 통제를 수반한다. 6월 항쟁을 통해 표출된 시민들의 희생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제도적 성과로 이어졌음에도, 권력 핵심부의 인식과 운영 방식은 반드시 이에 상응해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이현우가 이끈 경호실 역시 대통령 개인의 안전과 권위 유지에 최우선 가치를 두는 구조 속에서 운영되었으며, 그 보호 대상은 헌법 질서나 추상적 민주주의 가치라기보다 대통령 개인과 그 주변의 권력 기반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북방외교의 성과 뒤에는 이러한 경호 체계의 엄격한 보안 유지가 작동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이와 같은 보안 구조가 권력 내부의 비공식적 자원과 정보까지 포괄적으로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직선제 개헌을 통해 확보된 정치적 정당성이 제도적으로는 확립되었으나, 실제 권력 작동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폐쇄적 질서와 비공식적 경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통령 면담과 같은 제한된 접근 기회는 기업 활동과 밀접한 이해관계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고, 이 과정에서 경호실이 사실상 접근 통제의 핵심 관문으로 기능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경호실장의 역할은 단순한 신변보호를 넘어, 권력 접근의 경로를 조정하는 위치로 확장되었다. 경호실의 문은 곧 '정부와 시장을 잇는 유일한 관문'으로 기능했다. 이 문을 관리하는 이현우의 충성은 대통령에게 향한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 관문을 통과하려는 이들에게 잔혹한 선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북방외교로 대표되는 대외적 성과와 별개로, 정권 내부에서는 비자금 조성과 운용이 병행되고 있었다는 점이 이후 수사와 재판을 통해 드러났다. 노태우는 대선자금 잔여분을 포함해 재임 기간 중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기업들로부터의 자금 제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일부 자금은 특정 사업이나 인허가, 공사 수주와 연계된 청탁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국정 운영 과정에서 형성된 권한이 사적 이익과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며, 동시에 당시 정치·경제 환경 속에서 관련 행위가 일정 부분 관행처럼 인식되었던 측면도 함께 논의된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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