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지난 5월 28일, 하늘이 흐리더니 결국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 가기 좋은 곳 어디 없을까요?" 집에만 있기 아쉬워 넌지시 던진 한마디에 남편이 강화도 전등사행을 제안했다. 아이들 어릴 때 가본 이후로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손주의 기저귀와 간식거리를 챙겨 나섰다. 퇴직 후 내일 출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홀가분함 덕분인지, 요즘 우리 부부는 어디 가자는 말만 나오면 앞뒤 재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곤 한다.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는 생각으로 망설임 없이 비를 뚫고 차를 달렸다. 정비 공사로 조금 달라진 전등사 주변 풍경을 지나 안내판을 따라 북문 쪽에 주차를 했다. 성문 사이로 보이는 산사의 초록이 빗물에 씻겨 유난히 싱그러웠다. 비 내리는 흙길을 유모차를 밀며 올라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진흙이 된 길에 바퀴가 빠져 낑낑대며 올라가야 했다. 숨이 조금 가빠질 때쯤 전등사 입구에 다다르자, 수백 년의 세월을 버텨온 우람한 고목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세찬 바람과 빛을 따라 몸을 이리저리 휘어가며 자란 아름드리나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로운 예술 작품이었다. 어느덧 부슬부슬 내리던 비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전설의 은행나무 모진 세파를 견디며 몸을 굽힌 고목들을 바라보았다. 그 낮춤은 홀로 살아남기 위함이 아니라, 제 아래 자리 잡은 어린 풀 한 포기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그늘 한 자락을 더 내어주기 위한 포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중한 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기꺼이 자신을 굽힐 줄 아는 겸손, 그것이 수백 년을 살아낸 나무가 내게 건네는 엄중한 가르침이었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니 전등사의 유명한 전설을 품은 은행나무가 보였다. 과거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스님들이 3일 기도를 올린 후부터 단 한 알의 열매도 맺지 않게 되었다는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다. 가혹한 요구에 열매를 맺지 않는 방식으로 무언의 저항을 했던 두 나무는, 이제 열매 대신 울창한 초록 그늘만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었다. 비워냄으로써 저항한 나무의 마음을 헤아리니 산사의 빗소리가 더욱 깊게 들렸다. 대웅보전으로 가기 위해 '대조루' 밑을 지나갔다. 지면과 사이를 두고 지은 누각인데, 전등사의 핵심 관람 포인트 중 하나다. 누각 아래 좁은 계단을 오르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면 대웅보전의 본존불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낮은 곳에서 가장 고귀한 곳을 바라보게 만드는 건축 구조에서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였다. 마당에는 지난 석가탄신일의 여운이 담긴 오색 연등이 빗방울을 머금은 채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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