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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 | Collector
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
오마이뉴스

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

6·25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강원도 양구의 미군 부대 주둔지. 판문점에서는 유엔군과 북한·중국군의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양측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산속에 있던 중국군과 북한군 빨치산들은 새벽 2시만 되면 4시까지 미군 진영을 향해 징, 꽹과리,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댔다. 미군 장병들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고통과 피로를 호소했지만 유독 위생병(의무병) 앨런 찰스 헤이먼은 처음 듣는 한국 악기들의 소리가 듣기 좋아 이 시간을 기다렸다. 특히 오보에와 비슷하면서도 거칠고 호소력 짙은 음색의 나팔 소리가 매력적이었다. 한국인에게 악기 이름을 물어보니 태평소(새납)라고 했다. 한국전에서 국악과 반려자 만나고 예수도 영접 헤이먼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음악학도였다. 1931년 3월 16일 미국 뉴욕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독일계 유태인 집안으로 아버지는 문구점 주인이고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였다. 음악을 좋아해 컬럼비아대 음악학과에 진학했으나 아버지가 등록금을 못 대주겠다며 강권해 의예과로 옮겼다. 하지만 의과대 본과 진학에 실패하고 입대해 1952년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쟁 중에는 국악을 만나고 예수도 영접했다. 장교 막사 앞에서 보초를 서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깜빡 잠이 든 사이에 빨치산이 몰래 들어와 음식과 옷가지와 카메라 등을 훔쳐갔다. 근무 태만으로 징벌받았으나 다른 병사가 "깨어 있었다면 빨치산에게 목이 잘렸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그 순간 예수가 자신을 지켜줬다는 생각이 들어 제칠일안식일예수제림교회 신도가 됐다. 운명적인 만남은 또 있었다. 야전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 고정순을 만난 것이다. 1954년 귀국해 컬럼비아대 학사과정을 마치고 대학원에서 음악교육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서양음악을 배우면서도 한국에서 듣던 국악기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러나 동료 학생은 물론이고 교수들마저 한국 전통음악을 전혀 알지 못했고 도서관에서도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어 궁금증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국인 유학생에게 한국 전통음악에 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5000년 역사를 간직한 악기 종류가 아주 많을 뿐 아니라 장르도 판소리, 가곡, 단가, 산조, 정악, 제례음악, 농악, 불교 음악, 무속 음악 등 풍부하고 다채롭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헤이먼은 한국 전통음악을 배우고 싶어 한국행을 결심했다. 양구 야전병원에서 만난 간호사 고정순과 결혼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동안 고정순과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왔다. 부모는 그의 한국행도, 한국 여성과의 결혼도 모두 완강하게 반대했으나 말릴 수 없었다. 당시에는 민간인이 한국에 입국하기 쉽지 않았다. 1959년 석사 학위를 따고 그해 12월이 돼서야 비행기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공항에는 고정순이 마중나왔다. 한국식 성명은 미국인 선교사가 미국식 성 헤이먼과 발음이 비슷한 해의만으로 지어주었다. 바다를 건넜다고 해서 해(海)를 성으로 삼고, 이름은 '옳은 일을 많이 하라'는 뜻으로 의만(義滿)이라고 했다. 국악예술학교에서 국악 배우는 대신 영어 가르쳐 해의만은 이듬해 초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문을 연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에 무작정 찾아가 박헌봉 교장에게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테니 한국 전통음악을 배우게 해 달라"고 졸랐다. 박 교장은 "우리 학교는 규모도 작고 예산이 없어 월급을 드릴 처지가 아니지만 대신 소리와 악기를 가르쳐주겠다"라고 답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오선보(五線譜) 사용법도 가르쳤다. 국악은 모눈종이에 한자로 음을 적는 정간보(井間譜)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읽기에 불편하고 정확한 음을 표시하기도 어려웠다. 국악의 세계화나 표준화, 양악과의 협연 등을 위해서는 오선보 활용이 필요했기에 그는 수업료를 톡톡히 낸 셈이었다. 경남 산청 출신의 박헌봉은 진주에서 가야금을 배우고 서울의 정악견습소와 이왕직아악부에서 연구한 국악의 대가였다. 조선음악부 상무, 대한국악원장,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등을 두루 지냈으며 그를 기리기 위한 박헌봉 국악상도 제정됐다. 스승을 제대로 만난 것이다. 해의만은 박헌봉을 비롯한 국악예술학교 교사들과 당대의 명인·명창에게 국악의 다양한 장르를 배웠다. 정악은 홍원기, 판소리는 박록주, 단가는 김경희, 장구와 북은 지영희, 태평소는 방태진과 최인서, 피리는 이병우, 거문고는 신쾌동, 가야금은 유대봉, 범패와 작법은 임준동, 설장구는 이정범과 김병섭을 사사했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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