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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니까 했다"... 이 대통령의 질책이 드러낸 민주주의 중대문제

"제가 숙의하라고 그랬잖아요. 숙의를 하라. 논의해서 결정을 하라는 거잖아요." 지난 17일, 이재명 대통령이 정부세종청사 국무회의에서 한 말이다. 검찰개혁 입법 과정에서 숙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이자 자성의 의미로 읽혔다. 어려운 의제일수록 끝까지 토론해야 수용성이 높아지는데, 현실은 "뭐 그냥 하라니까 했다"는 식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이 발언을 듣는 순간, 한때 같은 학교에 몸담았던 동료 학자 조지프 베셋(Joseph Bessette)이 떠올랐다.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라는 개념을 처음 학문적으로 정식화한 인물이다. 그에게 이 개념을 만든 계기를 물었더니 동기는 의외로 소박했다. 연방정부와 지방정부에서 9년간 공직 생활을 하면서, 의원들이 법안들을 꼼꼼하게 따져 묻는 과정 없이 표결에 임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목격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따져 묻는 과정,' 즉 숙의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란 것이다. 이 문제의식이 1980년 논문이 됐고, 이후 회자하는 개념이 됐다. 공교롭게도 이 대통령의 발언 날, 스웨덴 예테보리대학교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가 연례보고서를 발표했다. 전 세계 민주주의 수준을 국가별로 측정해 등급을 매기는 보고서다. 2026년 보고서 에는 '숙의민주주의 지수'라는 항목이 있다. 정치적 결정이 공개적 토론과 합리적 논거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도를 측정한 것이다. 한국은 이 지수에서 48위에서 7위로 뛰어올랐다. 비상계엄 내란을 시민이 되돌리고, 탄핵을 헌법 절차로 관철시킨 경험이 반영된 수치다. 종합 순위에서도 한국은 41위에서 22위로 올라 자유민주주의 지위를 되찾았다. 같은 보고서에서 미국은 종합 순위 24위에서 51위로 추락하며 50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탈락했다. 숙의민주주의 지수는 더 처참하다. 91위다. 보고서는 그 원인을 구체적으로 지목한다. ▲ 정부가 정책 결정에 대해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정도 ▲ 시민사회가 정책 토론에 참여하는 정도 ▲ 주요 결정 전 자문 범위, 이 세 지표 모두에서 미국이 급락 국가 명단에 올랐다.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4년,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10년 걸린 민주주의 훼손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단 1년 만에 달성했다는 것이 연구소의 평가다. 솔직히 민주주의에 순위를 매기는 작업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미국 정치에서 숙의 과정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렇다면 숙의는 왜 무너지는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미국에서 숙의가 사라지는 과정 숙의가 안 되면 저 사람이 독선적이라서, 저 사람이 남의 말을 안 들어서라고 사람 탓을 하기 쉽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람을 바꿔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구조에 있다. 트럼프 2기는 숙의의 구조적 해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첫 번째는 따져 물을 수 있는 사람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한 연방 공무원 감축은 단순한 인력 조정이 아니었다. 인사관리처(OPM) 국장 스콧 쿠퍼에 따르면 2025년 한 해에만 약 31만 7천 명의 연방 공무원이 정부를 떠났다. < 사이언스 >(Science)가 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이공계 박사급 전문가만 1만 명이 넘었다. 국제 원조를 담당하던 기관이 해체되고, 질병 관련 정보공개 사무실이 문을 닫았으며, 해외 방송을 맡던 기관은 위성 계약이 끊겨 방송 역량을 잃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정책 전문성이 1년 만에 증발한 것이다. 정책을 검토하고 문제를 제기할 전문가가 사라지면, 숙의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두 번째는 토론의 통로 자체를 우회하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에게는 행정명령이라는 도구가 있다. 의회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 서명만으로 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제도다. 역대 대통령들도 이 도구를 사용했지만, 취임 100일간 평균 19.8건 수준이었다. 트럼프는 첫해에만 228건을 발동 했다. 역대 평균의 7배가 넘는다. 더 주목할 점은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당이 의회를 지배하는데도 의회를 거치지 않은 것은 토론이 귀찮았기 때문이 아니라, 토론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의회가 스스로 입법 권한을 내려놓은 셈이다. 세 번째는 반대 의견을 내는 비용을 극단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국립인문학기금(NEH) 보조금 폐지 소송에서 공개된 23시간 분량의 법원 증언 기록 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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