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지난달 16년 7개월 통역관 생활 마치고 퇴임 트럼프 친필 사인 감사장 받고 성대한 은퇴식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외교 통역입니다. 언어에 능통하다고 해서 통역이 완성되는 건 아닙니다. 분석력이 좋아야 합니다. 사람의 말은 나무와 같습니다. 기둥과 나뭇가지, 잎이 있죠. 통역 대상이 하는 말 중 기둥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나뭇가지는 뭔지 파악해야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한국어 ‘입’과 ‘귀’로 활동했던 이연향 미 국무부 전 통번역국장은 26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가진 한국 특파원단과의 간담회에서 통역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2009년 미 국무부 통역관으로 발탁돼 ‘닥터 리’로 불리며 활약했던 이 전 국장은 지난달 말 은퇴했다. 이 전 국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친필 사인이 담긴 감사장을 받는 등 성대한 은퇴식과 함께 16년 7개월간의 통역관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전 국장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얼굴이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면 어김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곁을 차례로 지켰다. 지난해 8월 백악관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1차 한미정상회담, 10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계기로 개최된 2차 정상회담에서도 미국 측 통역관으로 활약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노트에 적어가며 명쾌한 한국어로 전달해 주목받았다. 이 전 국장은 2018~19년 열렸던 3차례 북미정상회담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입과 귀 역할을 했다. 이 전 국장은 북미정상회담 통역을 정말 맡고 싶었다고 했다. 모친이 평양 출신이라 어린 시절부터 북한 말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북한과 미국 정상이 마주 앉는 날이 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고 되돌아봤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마무리됐지만, 이 전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모두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고 전했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정상회담은 긴장이 많이 됐습니다. 편안하면서도 긍정적이고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통역관인 제 목소리가 떨리면 안 됐기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세 차례 회담 모두 진지하게 대화하려는 의지가 보였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좋다는 건 맞는 말이에요.” 이 전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오바마 전 대통령 통역 업무가 상대적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말을 하면서 굉장히 다양한 생각을 하고 속도가 매우 빠르다. 제3자가 보기엔 트럼프 대통령이 말을 하다 갑자기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것 같지만, 이유가 있는 전환이다. 연결 고리를 건너뛴 것인데 왜 그랬는지 파악해야 정확한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에 대해선 “변호사 출신이라 그런지 법률 문서 같은 발언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외교 통역을 하다 보면 난감한 일도 종종 생긴다. 일화를 하나 소개해달라는 요청에 이 전 국장은 과거 바이든 전 대통령이 부통령 시절 방한했던 시기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바이든 전 대통령은 한국을 향해 “미국에 맞서 내기하지 말라”며 강경한 발언을 했고, 이 전 국장은 나름 수위를 낮춰 통역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통역이 오역을 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속이 상한 이 전 국장은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방안도 생각했지만 통역관의 숙명이라 생각하고 혼자 삭였다. 이 전 국장은 어린 시절 외교관이었던 부친을 따라 이란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는 이란 혁명(1978~79년)이 발발하기 전인 왕정 체제였다. 이 전 국장은 “어린 시절 기억의 이란은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였다. 혁명 이후 이란이 변한 걸 보면서 많이 놀랐다.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국가가 바뀔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이 전 국장은 전업주부였다가 미국 대통령의 통역관으로 발탁돼 눈길을 끈다. 서울예고, 연세대 성악과를 졸업한 이 전 국장은 아이 둘을 키우던 와중 33살에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인생 2막을 열었다. “살아보니 가장 중요한 건 ‘열린 마음’인 것 같아요. 나와 다른 걸 싫어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가짐입니다. 비판도 좋지만 긍정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스맨’이 문제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저는 무조건 ‘노’라고 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봅니다. ‘안 돼’라고 하기 전에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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