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스페인 카탈루냐 코스타 브라바의 푸른 품에 안긴 작은 해안 도시 레스칼라.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찬란한 발자취를 남긴 고대 항구 도시 엠푸리에스 유적지 깊숙이 들어가면, 지중해 발효 문명의 도도한 숨결을 고스란히 박제해 둔 특별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엠푸리에스 고고학 박물관(Museu d'Arqueologia de Catalunya - Empúries)'이다. 1614년에 건립된 이 석조 건축물은 성모 영보 수도원(Convento de la Anunciación)이 있던 자리다. 박물관은 이 유서 깊은 수도원의 터와 외관 원형을 보존하며 현대적인 전시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1908년, 카탈루냐 정부의 주도로 엠푸리에스 유적의 공식 발굴을 주관했던 카탈루냐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이자 고고학자 푸이그 이 카다팔크(Puig i Cadafalch)가 방치되어 있던 수도원 건물 일부를 개조해 연구 및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것이 오늘날 박물관의 위대한 출발점이 되었다. 현재 카탈루냐 고고학 박물관(MAC)의 공식 분관으로 운영되는 이곳에는,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 제국까지 전개된 해양 문명의 유물들이 지층처럼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고대 파편들을 수습해 둔 흔한 전시관 정도로 생각했으나, 박물관의 어두운 전시실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그 인상은 곧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단순한 유물 보관소가 아니었다. 2500년 전 지중해를 가로질러 역동적으로 이동했던 사람과 물자, 그리고 푸른 생선과 소금이 자아낸 발효 식품의 해상 이동 경로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거대한 역사 기록 보관소였다. 전시실의 가장 깊은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자, 그리스인들의 옛 도시 구역(Neàpolis, 네아폴리스) 안에서 출토된 백색 대리석의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 석상이 우리 일행을 압도했다. 기원전 4세기경 제작된 이 의술의 신 석상은 단순한 종교적 상징을 넘어,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 거친 코스타 브라바 앞바다까지 얼마나 완벽한 문명의 시스템을 이식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물이다. 그들은 단순히 무역 상품만을 실어 나른 정복자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고향에서 믿던 신앙과 철학, 고도의 의학적 지식, 건축 기술, 그리고 생선 내장의 자가소화효소를 다스려 맑고 영롱한 가룸(Garum)을 담그던 정교한 식문화까지, 이베리아반도의 변방에 통째로 뿌리내렸던 것이다. 2500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을 견뎌낸 석상 앞에 서서 유리창 너머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형형한 눈빛을 가진 신상은 마치 지중해 고대의 발효 과학과 감칠맛의 근원을 공부하기 위해 먼 길을 온 한반도의 이방인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는 듯했다. 그 눈길 끝에서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고대의 엠푸리에스는 그저 배가 드나들던 평범한 무역항이 아니라, 대자연의 시간과 인류의 지혜가 교차하며 위대한 감칠맛의 실크로드를 열어젖힌 거대한 국제도시였음을. 뾰족한 바닥의 비밀: 첨단 물류 패키지 '암포라(Amphora)' 박물관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수많은 암포라(Amphora) 컬렉션이었다. 인근 해역의 난파선과 항구 유적에서 출토된 이 특수 도자기는, 석조 발효 탱크에서 지중해의 태양과 해풍으로 완성된 감칠맛을 지중해 전역으로 퍼뜨린 주인공이자, 배의 화물칸에 안정적으로 적재하기 위해 설계된 고대의 물류 컨테이너였다. 박물관에 전시된 암포라들은 지중해가 단순한 바다가 아니라 거대한 발효 식품 유통망이었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암포라 안에는 올리브유·와인·곡물뿐 아니라 가룸(Garum)과 리쿠아멘(Liquamen) 같은 발효 생선 소스가 담겨 있었다. 오늘날 한국의 액젓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이 발효 조미료들은 지중해 전역으로 유통되며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식탁을 지배했다. 그 앞을 서성이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한국의 장독처럼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지 않고, 아래쪽을 뾰족하게 만들었을까?' 우리를 안내한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오랜 궁금증이 순식간에 풀렸다. 뾰족한 바닥은 육지에서는 불안정해 보이지만, 파도에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상선의 화물칸에서는 최고의 효율을 발휘하는 구조였다. 선원들은 배 밑바닥에 두꺼운 모래를 깔거나 나무 틀을 놓은 뒤, 뾰족한 암포라의 끝을 깊숙이 꽂아 넣었다. 이렇게 하면 거친 풍랑 속에서도 도자기가 쓰러지지 않았고, 둥근 형태보다 훨씬 더 촘촘하고 밀도 있게 화물을 적재할 수 있었다. 암포라의 뾰족한 바닥과 양손잡이는 세명의 인부들이 배에 싣고 내리기에 최적화된 첨단 해상 물류 패키지였던 셈이다. 운송 중 내용물을 보존하는 기술 또한 놀라웠다. 염도가 높고 냄새가 강렬한 액젓이 장거리 항해 중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암포라 내부는 꼼꼼하게 송진과 밀랍으로 코팅되었고 입구는 천과 점토로 빈틈없이 밀봉되었다.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도자기 겉면에 잉크로 적힌 글귀들이었다. 폼페이 출신의 생산자 '스카우루스(Scaurus)' 같은 이름표는 물론이고, '최고 등급 고등어 액젓(Liquamen flos scombri excellens)'이라는 원산지와 품질 등급 표시가 명확히 새겨져 있었다. 인류는 무려 2500년 전에 이미 제품 패키징, 원산지 관리, 브랜드 마케팅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체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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